조응천은 1962년 출생으로 대구시 북구 산격동 출생으로 2022년 기준 나이 61세이다.이후 대구 성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사법연수원 18기로 수료 후 해군 군법무관으로 병역을 해결하고 1992년부터 검사로 근무를 시작해 같은 해 박지만의 마약 수사를 맡았다.
국민의 정부 때는 검사 신분을 유지하면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역점 정책이었던 인권법의 토대를 닦으며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추진했다.
이후 2004년 노무현 참여정부 당시 부패방지위원회 실태조사단장으로 파견되어 공수처법의 모태인 고비법(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법)을 만들어링크 국회에 제출하고 검찰에 복귀했다. 그러나 검찰의 권한을 분산시키는 고비법을 추진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 좌천성 인사를 당하고 2005년 검사직을 사임했다.이후, 김앤장 변호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참여정부 후기인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법무부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국가정보원 원장 특별보좌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변호사로 돌아갔다.
2013년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법질서사회안전분과 전문위원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일했으며 2013년 3월부터 2014년 4월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을 역임했다.세계일보에 청와대 내외부 인사에 관한 감찰 자료가 보도되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2014년 4월 15일 전격 해임되었다.
요약하자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까지 4개의 정권에서 요직을 맡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4개의 정권은 이념과 성향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본인이 선거 홍보물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꾸준히 중용될 정도로 능력과 도덕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소위 청와대 '문고리 3인방' 등 비선실세의 국정농단과 전횡을 견제하다가 해임된 후, 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의 인재 영입 대상으로 2016년 2월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여 20대 총선에서 2016년 4월 제20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공수처법을 반대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노무현 정부 부패방지위원회에 파견되어 고비처법을 만든 장본인이다. 공수처 설치에는 찬성 입장이었으나, 2019년 패스트트랙으로 상정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안의 일부 조항에는 우려를 표명했다.2019년 12월 30일 본회의 표결에서 4+1 공수처법에 대해 자기 생각과 다르지만 당론이어서 찬성 표를 던졌다고 했다.조응천 의원은 공수처 찬성 검경수사권 조정안 반대 입장이었고 금태섭 의원은 공수처 반대 검경수사권 조정안 찬성입장이었다.
제21대 총선에서는 경선을 통해 공천을 받았으며, 본선에서는 59,779표를 득표하여 상대후보를 20,461표차로 누르고 압도적 차이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20대 총선에서는 249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2020년 12월 10일 국회 본회의에는 참석했지만, 공수처법 개정안 표결에는 불참하며 기권이 자신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LH 직원들의 투기 의혹 이후 부동산 투기로 인한 부당 이익을 환수하는 법을 반대하면서 헌법에 반대되는 소급 입법은 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에게 욕을 먹었다
[논란] 검사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를 봐줬다는 의혹이 있다. 박지만 씨가 마약으로 3번째 구속됐을 때, 치료감호를 청구한 것. 이후 조응천이 김앤장으로 들어가면서 그 의혹은 증폭됐다. 그래서 그런지 20년 후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로 들어간 것도 의문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임대차 3법 처리 전 전셋값을 올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을 받았다. 윤석열 장모 구속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저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구속”이라며 “(공범들은) 다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틀린 주장이다. 정확한 사실은 동업자들은 2015년 경찰에 입건돼 2017년 1명은 징역 4년, 나머지 2명은 각각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받은 것이다.